‘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니, 걷고 싶었다. 나도 하루 만보를 걷고, 아니 삼만보를 걷고, 꿀잠을 자고 싶다. 생각 많은 생각에서 조금 가벼워지고, 걷는 나, 먹는 나, 자는 나로서 살고 싶다. 

그래서 걸었다. 만보를 다 걷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안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동네에 살면서 처음으로 걸어보는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밭이 초록으로 푸르고, 또 어떤 밭은 갈아져서 황톳빛이 드러났다. 또 어떤 땅은 우리 집 마당처럼 딱딱하고 윤기 없이 말라가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는 땅의 빛깔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었다. 초록, 황토, 마른땅을 찍었다. 마른 풀이 덮여 있는 땅과 쑥이 미친 듯이 올라오는 밭을 찍었다. 땅을 사진으로 담았다. 하지만, 비닐로 덮인 검은 땅은 피해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검은 비닐로 덮여 있는 밭은 사진 속에 담고 싶지 않았다. 감자 같은 작물을 심고, 검은 비닐을 땅에 덮으면, 풀이 나는 걸 좀 막을 수 있다. 따뜻하기 때문에 작물도 빨리 자라기도 한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작물을 기르는 건 쉽지 않다. 언제나 심은 작물보다, 풀이 먼저 자라고 그 생명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농촌의 길을 걸으면서 초록의 밀밭과 보리밭, 그리고 작물을 심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밭의 색깔을 좋아한다. 한편, 검은 비닐로 덮인 밭은 눈을 돌리고 싶다. 비닐을 덮지 않고, 풀을 뽑으며 기르는 유기농은 정말 어렵다. 풀과 함께 기르는 농사는 더욱 어렵다.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많이 먹고 싶고, 다양하게 먹고 싶고, 제초제를 뿌린 농산물을 먹고 싶지 않은 나, 나는 비닐멀칭한 밭은 싫어한다. 검은 비닐이 땅을 덮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 저 비닐이 결국엔 쓰레기로 지구 한구석을 채울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눈을 돌리고 싶다. 건강한 것을 먹고 싶고, 다양한 맛을 먹고 싶고, 또 많이 먹고 싶고, 아름다운 밭은 보고 싶어 한다. 모순이라는 말이 딱 맞다. 

눈 감고 보기 싫어하는 것들. 없는 것처럼 사진에서 빼 버리는 풍경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다. 그것도 나의 일부라고. 그러니 미워하지 말고 없는 척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 검은 비닐 덮인 땅을. 

<오늘을 살아가는 친구들>


얼마 전, 친구 부부가 작은 가게를 열었다. 직접 구운 카스테라 한 접시에 담담하게 내린 커피 한잔, 우유 한잔.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메뉴다. 하루 장사를 끝내고 다시 빵반죽을 하고 내일 팔 카스테라를 굽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카스테라처럼 보드라워졌다. 날마다 걸레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빵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뜰을 가꾸는 친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이 40세. 그렇다. 불혹(不惑), 미혹되지 않는 나이, 마흔이 되었다. 물론 나는 공자가 아니니, 하루에도 수십 번 혹한다. 혹하기도 하고,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 칭찬 한 마디에 혹 하기도 하고, 여덟 살 아이가 던진 ‘엄마, 싫어.’ 한마디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30년 가까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책을 읽는 ‘할머니 독서모임’이 있다. 불혹의 나이에 모이기 시작하셨는데, 이제는 할머니들이 되셨다. 


첫 모임은 1985년 어느 목요일에 있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무려 30년 동안 두어 번 정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쉬었을 뿐이다. 한때 스무 명에 이르렀던 회원이 지금은 다섯으로 고정되었다. 가끔씩 마을에 새로 온 젊은 처자들 한둘이 소문을 듣고 드나드는 정도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처럼 마르지 않는 이 한결같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일까? 홍 사모님이 살짝 웃으면서 말한다.

“사실 쭉정이들만 남은 거예요. 똑똑한 이들은 바빠서 모두 제 일들 하러 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공부할 겸 매주 나와서 책을 읽은 거예요. 머리가 좋아서 정리해서 발표하지는 못하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게 그저 좋았습니다.” 

(2015년 7월 14일 한국일보 '불혹에 만나 칠순 훌쩍… 책 덕분에 평생 벗으로 살죠.' 기사 중에서)


할머니들은 열 권짜리 우찌무라간조 전집을 다 읽으셨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다 읽고 하동으로 역사기행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시골 작은 식당에서 밥을 하시거나,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모여서 책을 읽어 오신 할머니들이다. 스스로를 쭉정이라고 말하시지만, 그 자리를 30년 동안 지켜 온 알곡 중에 알곡이다. 


지난 해, 도서관에서 ‘우리마을 사람책, 그녀들의 홍동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마을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을에서 40년간 미용실을 해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용사 할머니는 첫아이를 낳으러 시댁에 내려왔다가, 마을에 눌러 앉게 되고 결혼 전에 했던 미용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40년 동안 자신에게 머리를 맡겨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오래 미용실을 할 줄은 당신께서도 모르셨다며. 


그들이 70살까지 책을 읽자, 40년 이상 미용실을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날 미용실에 온 손님의 머리를 정성껏 말아드리고 이번 주에 같이 읽기로 한 책을 계속해서 읽었을 것이다. 때로는 날이 궂고 서로 감정이 상해도 약속을 지키고 그 자리를 지킨 하루하루가 모여서 30년이 되고, 40년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라져가는 토종씨앗을 모으고 그 씨앗을 평생 심고 기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청년이 있다. 철을 따라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고 다시 씨앗을 갈무리한다.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고 안정된 월급을 받을 수도 없지만 날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뿐만 아니라, 어디든 불러 주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만드는 친구, 날마다 같은 시간에 직장으로 출근하는 친구, 매년 텃밭일지를 만들고 꼼꼼히 농사기록을 채워 나가는 친구… 


마흔이 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흔한 자격증 하나 없고 여전히 어떻게 살지, 뭐 하고 살지 고민 많은 나를 보면 답답하다. 하지만 일상의 자리를 지키며 매일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볼 때 마음이 놓인다.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겨울 밭은 고요하다. 언뜻 보면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고요한 밭에서 겨울을 보낸 밀, 보리, 양파, 마늘은 봄이 되면 튼튼하게 자란다. 그 자리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요한 겨울 밭이 없이는 열매도 없다. 씨를 품고 추위도 바람도 햇볕도 담담히 겪어내는 겨울 밭을 닮고 싶다. 









우리 집

2017. 3. 8. 01:52

< 우리 집 > 


이제 곧 다섯 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다. 우리가족은 6년 전 늦가을, 이 집으로 이사 왔다. 포대기에 업고 이사 왔던 둘째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밭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동네 어르신이 소개해 준 집이다. 이전에 살던 집이 크고 깨끗했지만 전세가 비싸고, 둘레에서 밭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개받은 이 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오래된 집이었지만, 집에 딸린 텃밭이 무척 아름다웠다. 손이 부지런하고 눈이 고우시던 할머니는 밭 둘레에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두셨다. 이 집에서 살던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가꾸시던 나무와 꽃은 남아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봄에는 수선화를 시작으로 매화와 앵두꽃이 폈고 가시오가피 순과 두릅 순은 봄을 알리는 반찬이 되어 주었다. 밭에는 봄마다 달래, 냉이가 쑥쑥 올라왔다. 여름에는 풋대추를 따먹고 보리수 열매를 거두어 술을 담그고 잼을 만들어 먹었다. 가을에는 앞뜰 뒤뜰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 늦가을에는 은행나무 열매 냄새와 모과 열매 향기가 묘하게 섞였다. 밭에서 우리가 기르고 가꾼 것보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나무와 꽃, 열매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가만히 방에 누워있으면 뒤뜰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창문을 열면 청설모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웃풍이 심한 옛날 집이라 겨울에는 거실에 나무난로를 두고 불을 지폈다. 겨울 내 짬짬이 나무를 자르고 쪼개는 것이 남편의 일이었다. 난로에 불이 잘 붙지 않으면 온 집안이 오소리 굴처럼 연기가 가득했고 눈이 매워서 방으로 피신했다. 난로에 불이 잘 붙은 날에는 난로 속 발간 불빛만 보고 있어도 참 따뜻했다. 감나무 옆에는 닭장을 지어서 닭을 키우고 토끼를 키웠다. 며칠 집을 비우는 날에는 동네 친구들이 들러서 토끼풀, 닭풀을 뜯어주고 갔다. 도시에서만 자랐던 내가 암탉 소리와 수탉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농사짓고 청소년들과 수업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서 하루 3끼 밥을 차렸던 시간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내게는 너무 버거워서 울고 화내고,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날들도 많았다. 오래되고 낮은 집이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습했다. 장마철에는 옷장에 넣어둔 옷에도 곰팡이가 생겼다. 습하고 더운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긴 여름 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늦게 집에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시골집이라 여기저기 쥐가 구멍을 뚫고, 천장에서는 쥐들이 뛰어다녔다. 거실에서 쥐와 마주치고 까무러치기도 했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게 이런 것이겠지. 이집에서 지냈던 6년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면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맛있는 기억이 많아서 다행이다. 


지난 봄, 새로운 집터를 마련하고 여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쥐가 뚫지 못하게 튼튼하게, 바람이 새어 들지 않는 따뜻한 집을 지었다. 건축은 동네 목수 친구들이 맡아주었다. 모자란 돈은 담보 없이 ‘도토리회(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이 모은 협동기금을 이용하여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협동조합형 마을은행)’에서 빌렸다. 집터도 친구가 땅을 저렴하게 내주어 마련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의 삶이 항상 그래왔듯이, 집을 짓는 과정도 동네 친구들, 형님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가난하고 행복하게, 소박하고 아름답게’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표어를 내걸고 결혼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학교 소강당을 빌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하고 싶었지만 실상 나는 가난하지 않았고 가난이 뭔지도 몰랐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난하게 살겠다는 목표가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사를 앞둔 내 마음에는 부끄러움이 있다. 가난하게 살겠다고 했는데, 으리으리한 새집으로 이사라니. 이젠 가난한 척하기도 틀렸다.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이사일 수도 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볕이 잘 드는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가난하게, 혹은 아름답게 살겠다는 목표는 버렸다. 그저 열린 집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을이 우리 가족에게 큰 품을 내어주었듯이, 우리 집이 누군가에게 열린 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 가는 집, 피곤한 친구들에게 낮잠을 선물하는 집, 시원한 맥주 한잔에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는 집. 이 정도 바람은 가지고 살아도 되겠지. 이제 농사지을 땅도, 평생 맘 놓고 살 집도, 어디 도망 못 가게 나를 잡아줄 빚도 생겼으니. 그 정도 바람은 가져도 되겠지. 







 그 날의 기억

 그 날은 말이야. 아주 밝은 날이었어. 화창한 날이었고, 아마도 봄과 여름 사이였을 거야. 눈부시게 반짝이던 햇살이 또렷이 기억나거든.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밝지만은 않지. 친구야, 갑자기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냥 너에겐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야. 너는 나에게 가벼운 공감의 말을 건네거나, 억지스레 편드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래. 바로 그 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가 단짝으로 날마다 붙어 다녔던, 심지어 화장실도 손잡고 같이 가던 열두 살, 그 시절의 이야기야. 체육이 있었던 날이었을까. 그날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었지. 촌스러운 초록색 티셔츠와 남색 반바지의 그 체육복 기억나지. 너랑 삼거리슈퍼 앞에서 인사를 하고 집으로 왔어. 우리는 꼭 삼거리슈퍼 앞에서 헤어졌어. 가끔은 삼거리슈퍼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가끔은 너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지만, 우리집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지. 언젠가 네가 집이 어디냐고 궁금하다고 했는데, 그냥 저기 위로 쭉 올라가면 된다고 얼버무리고는 가르쳐주지 않았어. 지금 생각하면, 단칸방이 뭐라고, 옥탑방이 뭐라고 그렇게 했는지 후회가 되곤 해. 삼거리슈퍼 앞에 서면, 항상 조마조마했어. 네가 또 우리집에 놀러가고 싶다고 하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걱정이었지.

 그날 삼거리슈퍼 앞에서 너와 헤어지고, 혼자 털레털레 집으로 걸어왔지. 집 안에는 아버지가 방에 누워 계셨어. 일 나간 엄마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어. 아침에 학교 갈 때처럼, 그는 방에 누워 있었지. 집 안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어. 술이 깨고 있는 건지, 술이 취하고 있는 건지. 기억이 가물거려. 단지, 날선 말들이 오갔고. 그래, 날선 말들. 어쩌면 내가 먼저 그를 비난하는 말들을 쏟아 놓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아무 말을 안했을지도 몰라. 비난의 눈빛만을 쏟아놓았을지도 모르지. 그 날의 날씨도, 그 날의 옷도 또렷이 기억나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기억이 없어. 마치 필름이 끊기듯. 화가 난 그가 소리를 지르며 식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던 장면. 그를 피해 방으로 뛰어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덜덜 떨었던 장면. 창문에 비친 식칼을 든 아빠의 얼굴. 그렇게 몇 장면만 멈춰진 사진처럼 남아있어.

 다음날 너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 봤지. 무슨 이야기든 너에게 조잘거리며 털어놓던 나였는데, 그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그네만 같이 탔던 것 같아. 가장 친했던 너에게도 단칸방, 술 취한 아버지, 무서웠던 기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어. 힌트조차 주고 싶지 않았지. 뭔가 말을 시작하면, 다 쏟아져 나올 것처럼 불안했어. 내게 지긋지긋했던 것들을 너도 혐오하며 너조차 떠나가 버릴까봐 두려웠지.

 오늘. 네가 죽었다는 부고문자를 받고서, 왜 나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무슨 일이야? 괜찮아?’라고 물었던 너의 물음에 나는 이제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네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일이야? 괜찮아?’ 라고 물어보지 못했던 내가 후회스러워서 일까. 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있는 건 아닐까. 괜찮지 않은데, 괜찮냐고 묻는 건 아닐까. 머뭇거리다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말았어. 답을 들을 수 없어도 너에게 물어볼 걸. 그리고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할 수 없어도 괜찮아.’ 라고 이야기할 걸.

 

2015-11-02
발바닥소설



“초밥세트B 하나 주시고요. 냉모밀도 주세요.“

“일행은 몇 분 이세요?“

“일행 없고, 저 혼자 먹을 거예요. 메뉴 되는대로 빨리 주세요.”

“네.”



소설책을 꺼내 놓고, 메뉴를 기다렸다. 초밥세트B에는 유부초밥 하나, 새우초밥 하나, 광어초밥 둘, 연어초밥 하나, 한치초밥, 맛살초밥, 계란초밥이 나왔다. 유부, 계란, 새우. 이것들을 초밥이라고 부르기는 좀 미안하지 않나? 먼저 광어초밥을 먹었다. 말캉한 느낌의 광어와 꼬들하게 지어진 밥이 입안을 가득채웠다.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계란은 부드럽다기 보다는 스폰지같은 느낌이었다. 계란은 가벼운 느낌 말아졌는데, 크기가 커서 입안에 가득 찼다. 생새우초밥이라면 탱글탱글 했겠지만, 익혔다가 얼려둔 새우는 퍼석했다. 연어는 누군가의 혓바닥처럼 부드럽고 기름졌다. 한치초밥에 와사비를 조금 더 올리고 간장에 찍어 먹었다. 와사비의 향기에 코가 찡했다. 초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냉모밀이 나왔다. 무즙과 와사비를 살살 풀어줬다. 반쯤 얼린 육수의 얼음이 입 안에서 차갑게 서걱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 맛이 없을까?’ 혼잣말을 읊조리고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난 며칠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낀 것은 맛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감이었고, 온도였고, 냄새였을 뿐. 맛이 아니었다. 새콤, 달콤, 매콤한 맛, 그리고 고소한 맛, 짠맛, 싱거운 맛. 그 맛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불과 2주전, K와 이 식당에 왔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모밀정식과 초밥세트A를 먹었다. 광어지느러미초밥은 매끄럽고 고소했다. 고슬고슬한 밥과 어우러져서 간이 딱 맞았다. 유부초밥은 약간 달콤한 맛이었다. 모밀소바 무즙은 매콤했고, 소바 간장은 짭짤했다. 레몬을 한 조각 넣은 얼음물은 싱그러웠다. 그와의 섹스는 또 어떠했나. 초밥을 먹은 그의 입술에서는 옅은 생강 맛이 났다. 그는 항상 내 가슴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동안 그 냄새와 맛에 취해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간지럽혔고, 그의 정수리에서는 잘 발효된 와인향이 났다. 그의 팔뚝에서는 바다를 닮은 짭짤한 땀내가 났다. 서로의 냄새를 사랑했고, 서로의 몸에서 짜고 달콤하고 비릿한 맛을 찾아내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그도 없었고, 그와 함께 느꼈던 맛도 없어졌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처음 싸웠던 이유를 기억할 수 없다.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몇 번의 말다툼이 드러낸 낯선 얼굴이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억울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아니었다. 귀찮음, 지겨움, 체념, 멸시. 아니다. 그것은 낯선 눈빛과 말이 아니었다. 아빠가 나를 떠나던 날, '내가 뭘 얼마나 잘 못했다고 그래? 정이라곤 없는 년‘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날의 그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난 27년간 수없이 마주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K에게서 그 낯익은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떠나기 전에 내가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 드셨으면, 후식 드릴까요? 녹차나 더치커피 가능해요.”

“네, 커피로 주세요.”



차가운 더치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갔다. 단단한 얼음을 와자작 깨물어 먹었다. “맛을 잃었지만, 버림받지 않았으니 괜찮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산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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