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야 산다

2008. 9. 19. 23:46



굼벵이 십여 마리, 검은색 톡톡이 십여 마리, 초록색 이름 모를 애벌레 두 놈. 오늘 내 손으로 죽인 녀석들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소영씨와 함께 학교생협 텃밭을 가꾼다. 농사를 조금이나마 배워보고자 한 주에 한번이라도 밭일을 함께 하기로 했다. 배추 길러서 김장 해먹자, 루꼴라 나면 피자 해먹자, 새싹들 올라오면 고기 구워서 새싹 쌈 싸먹자는 부푼 희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몇 주 사이, 배추는 굼벵이들이 뿌리를 파먹어 반 이상이 죽어버렸고, 밭에는 뿌린 씨앗의 싹 보다는 씨 뿌리지 않은 풀들이 여기저기 빼곡히 올라왔다. 이 녀석들! 은근히 화가 난다. 슥슥 호미로 풀을 뽑고 한 편에 휙 던져둔다. 땅을 파다가 발견한 굼벵이들은 호미로 절단 냈다. 뿔났던 마음에 웃음이 스민다. 요 녀석들, 잡히기만 해라. 열심히 흙을 뒤진다. 배추가 죽은 자리에 심으려 가져온, 청경채 이파리에 벌써 구멍이 송송 나있다. 까만 톡톡이들이 잎 뒤쪽에 붙어 있다. 요놈들은 장갑 낀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슬쩍 문질러 주면 퍼런 몇 방울을 내 놓으며 거의 흔적도 없이 죽는다.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초록색 애벌레, 이 놈들도 잎을 파먹고 있는 것 같다. 좀 크긴 하지만, 손으로 뭉개 버린다. 갓골에 사는 정현이와 양지도 나타나서 한 몫 한다. "여기도 있어요, 저기도 있어요." 벌레를 찾아 고발하면 나는 곧바로 출동한다. 애들은 징그러워서 직접 죽이진 못하겠다고 한다.

난, 참 잘도 죽인다. 고얀 놈들이라는 생각뿐이다. 농약 뿌리지 않고 농사지으려면 손으로 벌레를 잡아주는 일이 필수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소영씨는 나에게 농사가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그땐 웃었지만 다시 생각하니 한편 씁쓸하다. 농사가 체질이 아니라, 살생이 내 체질이구나. 살리는 농업을 하고 싶었는데, 나는 죽이는 것부터 신나게 하고 있구나.

하지만 내가 찾아서 죽인다고 해도 어차피 다 죽이지도 못할 것이고, 내 눈에 띄지 않아 죽음을 면한 수 많은 굼벵이, 톡톡이, 애벌레는 지금도 배추, 청경채를 파먹고 또 알을 까고 있을테니 괜찮다. 이리하여 잠시 느꼈던 양심의 가책은 이것으로 끝이다. 엄니께 벌레 죽인 이야기를 말씀 드렸더니 엄니께서는, ‘전쟁터에서는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적을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밭농사도 내가 뭘 좀 거둬 먹으려면 벌레를 잡을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역시, 옳은 말씀!

실상 밭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배추, 루꼴라, 청경채 등도 또 내 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어줘야만 한다. 살생은 새삼 내가 잘 하게 된 종목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나는 무언가 죽이면서, 생명을 빼앗으면서 내 생명을 이어 온 것이다. 단지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본래 내가 그랬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또 목요일이 되면 장화 신고 모자 쓰고 장갑 끼고 호미 들고 벌레 잡으러 갈 테다. 풀 뽑으러 갈 테다. 배추김치, 새싹 쌈, 루꼴라 피자 먹을 생각을 하며,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갈 것이다.
(2009. 09. 19)


이 구역에 심었던 배추 모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배추가 왼쪽에 보인다. 배추가 죽은 자리에 교나(?) 모종을 다시 심고 있다.


이렇게 예쁜 배추 모종이었는데, 거의 다 죽어버렸다.


바로 요 녀석 굼벵이 때문에 ㅠㅜ 배추는 뿌리를 다 먹히고 처참히 말라 죽었다. 이 녀석 굼벵이도 나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080919 작업을 마치고 소영씨와 함께!




*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 '농부와 인문' 숙제 생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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