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만의 휴식

2012. 3. 30. 14:48

한동안 참 많이 힘들었다. 봄을 타서 일수도 있고, 여울이 낳고 전업 육아만 한지 2년이 넘어가니 한계가 온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갈등, 불쑥불쑥 아이에게 쏟아 놓는 화, 남편에 퍼붓는 비난의 말들. 어느 정도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보다 더 나의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심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껴가면서 답답했다. 

이전에는 애들 좀 키워놓고, 일을 시작하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는데.. 곰곰히 들여다보니, 여울이까지 어린이집에 보내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화내는 일이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거기서 절망이 느껴졌다. 폭발할 것만 같은 마음, 어머님이나 남편이 애들을 봐주고 나만의 시간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해결되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내 머리속에는,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보기 싫어도 항상 틀어져있는 지하철 광고처럼, 머리 위에 항상 몇 장면이 생생이 떠올라 일상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억하기 싫은 몇가지 기억과 영상들. 그런데 자꾸만 반복되고, 애들을 키우면서 나의 모습과 그 영상들이 겹쳐져서 더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에게 '정신과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아 봐야겠다.' 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그런데,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러다가 이책, '30년만의 휴식'을 추천받았다. 추천한 이웃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읽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출판사도 마음에 안들었고, 별 기대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이 참 친절하게 쓰여져 있었다. 작은 글 하나에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친절한 필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보며, 자연스럽게 나도 내면에 숨어있던 나의 어린시절, 꼭 꼭 숨겨져 있는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얼마전 티비에서 봤던 구성애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의식의) 언어로 풀어내다보면 점점 비의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 생각속에만 있는 것들을 말로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건들, 장면들을 열심히 적어보았다. 

며칠 간, 밥하는 것도, 집 치우는 것도 제쳐두고 책 읽기와 글 쓰기를 계속했다. 누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말 친절하고 나를 비난하지 않을 정신과의사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생각나는대로 말이 되든 안되든, 열심히 풀어냈다. 팔목이 얼얼할 정도로. 때로는 억울했던 감정을 그 대상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무석 선생님의 또 다른 책, 자존감과 친밀감 책도 주문해서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대로 내 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남편과 꼭 나누고 싶은 것은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책을 읽고, 적으면서 생각보다 나의 삶에 참 복잡하고, 슬프고, 불쌍하고, 부끄럽고, 어찌할 수 없었던 순간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책읽고, 마음에 있는대로 글을 쓰면서 스르륵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만큼 가정을 꾸리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어려운 순간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누군가가 있었구나. 가해자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은 스스로 그 순간을 후회할 수도 있고, 그들 역시 어쩔 수 없어서, 약해서, 힘들어서 나에게 그랬겠구나. 라는 마음도 들었다. 지식으로 앎이 아니라,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내 마음이, 자라고 있다. 내 나이 서른 다섯에, 내 마음속에서 자라지 못하고 있던 아이가 조금씩 자라서 마음 넉넉한 어른마음으로 되어 가고 있다. 2주 정도, 내 마음을, 나의 비의식의 공간을 살피고, 다독이면서. 지금 내가 아이나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이, 바로 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누군가, 내 마음에 있는 (그 때는 화조차 내지 못했던) 대상들에 대한 화, 분노라는 것도 보게 되었다. 

여름이가 며칠 전에 '엄마, 요즘 엄마가 많이 웃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큰 상을 받은 것 같다. 그거면 충분하겠다. 많이 웃는 엄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아, 저 사람도 아파서 저러는구나. 저렇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라 고생각할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괜찮겠다. 남편은 '네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아', '나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정신없이 직장생활하며 지냈으면, 내 마음도 돌아볼 여유없이 지냈을텐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마음, 내 마음의 바닥, 그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업 육아의 시간이 참 고맙다. 나의 실체를 드러내어 보여준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이 시간들을 격려해주며 따뜻하게 안아준 남편에게도 고맙다.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책. 마음 한 켠에 해결 안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이유 없이(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솟구치는 분노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면 일단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30년만의 휴식 - 자존감 - 친밀감' 순서로 읽으면 좋다. 


* 30년만의 휴식 / 이무석/ 비전과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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