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털을 다 뽑았다. 보드라운 가슴 털을 뽑아, 이불을 만들었다. 바알간 가슴이 드러났다. 끙끙끙 발정 난 소리를 내며 유난히도 짝짓기에 힘을 쏟던 그해. 봄은 이불 같은 털 한 뭉치와 함께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갇혀 있는 신세에도 그렇게 열심히 끙끙거리며. 내가 여기 살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털을 뽑아 이불을 만들고, 새로 태어날 새끼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살고 있다고. 온 존재로 외치고 있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마. 아무런 다짐도 하지 마.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사는 거야.” 라이터를 켜며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달이 없다.” 현정은 담배 연기를 날리며, 말을 툭 내뱉는다.
“웃기고 있네. 달이 네 눈에 안 보이는 거지. 달이 없기는?” 그녀는 담배 한 모금 깊이 마신다.
“내 눈에 안보이면, 없는 거지. 내일 살게 될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 눈에 안보이면 없는 거야”

자그마한 상자 안은 털로 가득 찼다. 털은 이불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고, 가림막이 되었다. 꼬물꼬물 작은 생물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내지 않고 자라났다. 대신 그 어미는 끙끙 소리를 내며, 배고프다고 빨리 뭐라도 달라고 울어댄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무 하나, 양배추 하나, 사과껍질이라도 먹을 수 있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내 새끼를 키워낼 젖이 나온다. 먹은 만큼 젖이 차오르고, 젖이 차오른 만큼, 새끼의 배도 가득 찰 것이다. 그것이 살이 되고, 털이 되고, 발바닥이 되고, 또 그 새끼의 젖이 될 것이다.

“내가 살아 볼라고, 젖을 물렸지. 마구마구 그 조그마한 입에 내 젖을 물렸어. 다 내가 살자고 하는 짓이지. 그래도 그 조그만 입도 살아보겠다고 아구아구 빨아 먹더라고. 그게 고마웠지” 맥주잔을 채우던, 현정이 말했다.

새끼를 가져 한껏 부풀었던 몸은 바람 빠진 공처럼 주글주글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끼를 낳아본 자는 알고 있다. 낳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것을. 새끼 빠진 몸은 빨래같이 축축 쳐지지만, 젖을 품은 가슴만은 빵빵하다. 터질듯이 차오른다. 태어난 새끼는 살기 위해 젖을 찾는다. 낳은 어미도 살기 위해 젖을 물린다. 태어나고 낳았으나. 그들은 같은 처치이다. 각자가 살기 위해. 젖을 빨고, 젖을 물리는 그 순간도 결국은 각자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

“현정아, 드디어 나왔다.” 털로 만든 문에 구멍이 생겼고, 작은 상자 앞에는 아직 발걸음이 서툰 새끼 토끼 세 마리가 그녀를 바라본다. 현정은 서툰 낫질로 민들레, 씀바귀, 쑥, 냉이를 눈에 보이는 대로 슥슥 잘라와 토끼장에 넣어준다. 어미, 애비 토끼가 정신없이 풀을 먹는 사이, 새끼 토끼를 하나씩 꺼내어 클로버가 소복한 밭 한 켠에 내려놓는다. 현정이 뒤돌아 담배 한대를 다 피우는 동안, 토끼들은 낯선 클로버 풀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겨울을 지내고, 봄동으로 다시 살아보려 하는 배추 하나를 무심히 뽑아, 토끼장에 툭 던져준다. 새끼 토끼들도 살포시 다시 토끼장에 넣는다.

살아야 했다. 울어야 했다. 살기 위한 울음은 너를 살렸다. 나를 살렸다. 터져 나온 울음은 서로에게 이불이 되었다. 이불속에서 나는 울었고, 그 울음은 더 두터운 이불이 되었다.

“이건 무슨 꽃이야?” 그녀가 물었다. “음, 개망초.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지” 현정은 풀을 자르던 낫을 푹 던지고는, “아, 힘들어서 못하겠다.” 라고 말하며 토끼장 문을 열어젖힌다. 이제 어른 손바닥 하나 만큼 자란 새끼토끼들이 토끼장 밖으로 폴짝! 풀이 잔뜩 올라온 밭으로 토끼들이 뛰어간다. 현정은 차가운 물 한잔을 꿀꺽꿀꺽 마신다. 밭 여기저기 토끼들이 봄볕에 반짝인다.  (끝)

 

 

[발바닥소설 1] 그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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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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