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과 쭈쭈바

 

“진아, 자유시간 먹을래?”
“응. 엄마는?”
“오랜만에 연양갱 먹어야겠다.”
엄마는 자유시간과 연양갱을 하나씩 집어들고, 천원짜리 한장을 내민다.
“얼마예요?”
“5백원입니다.” 매점 아저씨는 검은 비니루 봉지에 물건을 집어넣고, 잔돈 5백원과 함께 돌려준다.

시외버스에 올라타니, 멀미가 날 것 같은 쾌쾌한 기름냄새가 진동한다. 15번 자리 아줌마 옆을 지나자,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엄마와 나는 17, 18번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창 쪽 자리다. 시외버스는 순식간에 번잡한 대구 도심을 빠져나갔다.

“옛날에 50원하던 연양갱이 더 맛있다. 3백원으로 올랐는데, 더 작아지고 맛도 없다.”
나는 50원짜리 연양갱을 먹어본 적도 없고, 3백원짜리 연양갱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건 엄마의 음식. 한번도 입에 대본적 없는 엄마의 간식이다.

자유시간을 한입 베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끈적이는 카라멜 사이로 땅콩이 오도독 씹힌다. 우물우물 천천히 씹어먹는다. 집에서 가지고 온 보리차를 한모금 마시고. 자유시간을 한입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
 
“외할머니 생신이가? 아닌데. 외할머니 생일은 홍시 나오는 가을이잖아. 이모집에 왜 가는데?”
엄마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창밖으로는 회색의 도로와 똑같이 찍어낸 듯 한 빨간 양철지붕 시골집들이 보인다. 썩은 어금니 사이로 자유시간 땅콩이 꼈다. 혓바닥으로 살살 밀어내 보지만, 땅콩은 쉽게 나오려 하지 않는다.

“구미 공단 나오세요. 공단입니다. 터미날은 다음에 내리세요.”

“내리자.”
엄마는 오른손에는 차표를 들고, 왼손에는 쓰레기를 담은 까만 비니루 봉지와 지갑을 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큰이모부가 서있다. 그 사이 배가 조금 더 나온 것 같다.
“처형, 어서 오이소. 진아, 잘 지냈나. 버스 타고 오느라 심심했제. 쩌기에 우리차 세워 놨다. 지난봄에 뽀나스 나와가, 하나 샀십니다. 프라이드라고 광고 봤제? 쩌기 회색차 보이졔? 저거 타고 집에 드갑시다.”

이모부가 문을 열어줘서 얼른 회색차에 올라탔다. 프라이드? 프라이드? 혼자서 중얼거려보는데, 어금니 사이에 땅콩이 다시 거슬린다. 프라이드는 좀 답답하다. 버스보다 천장도 낮고, 창문도 닫혀있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는 다 타봤는데, 프라이드는 처음이다. 실은 택시도 타 본적이 없다. 답답하게 느껴져 창문을 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창문은 어떻게 여는거지? 전혀 감이 안온다. 얼떨결에 타기는 했는데, 내릴 때 차문을 어떻게 열지? 저 손잡이를 돌려야 할까? 엄마는 차문을 열수 있을까? 귓속말로 물어볼까? 눈알을 굴리며, 혓바닥으로 땅콩을 밀어내며 걱정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큰이모집에 도착했다. 나의 예상과 달리, 엄마는 단박에 프라이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모네집 거실에는 내 키만한 선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거실에는 큰이모, 작은 이모, 작은 이모부가 앉아있다, 베란다 앞에는 8살 상원이, 5살 준현이, 3살 준식이가 플라스틱 블록을 맞추다가, 엄마와 나를 힐끔 쳐다본다.
 
“언니야, 내 못산다. 우짤라고 그카노? 얼마라고? 오백만원?”
큰이모는 인사도 안하고 엄마에게 질문을 쏟아낸다.
“처형이 무슨 죄가 있노? 앉아서 찬찬히 들어보자.”
큰이모부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뿌드득 뿌드득 씹어 먹으며 선풍기 앞에 앉는다. 우리집 방문보다도 큰 냉장고가 거실 한쪽에 서있다. 나는 샌달에 버클을 풀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큰이모가 나를 부른다. “진아, 진이는 외할머니랑 나가서, 수박 한덩이 사온나.”
샌들 버클을 풀고 있던 나는 버클을 다시 조였다. 외할머니가 손바닥 만한 지갑을 챙겨서 나온다.
“진아, 수박 사러 가자.”
나도 시원한 선풍기 바람 쐬면서, 블록놀이 해보고 싶은데. 속으로만 말해본다. 골목을 쭉 걸어나오니, 횡단보도가 있다. 횡단보도 옆에는 과일 가게가 있다.
“할머니, 저기 수박 있다.” 했는데,
할머니는 “저 집은 맛없고 비싸기만 하다. 이리 온나.” 라고 말하며, 앞서 걷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과일가게 앞을 지나고, 삼일슈퍼를 지나고, 형곡국민학교 교문이 보인다. 등에는 땀이 흥건하고, 샌들 안으로 모래가 들어와 까끌거린다. 외할머니는
“니 애비는 지금 어딨노?”
“집에 있어요.”
“또 술쳐먹었나. 니 땜에 느그 엄마가 이 고생을 한다. 그때 니 버리고 모질게 나왔어야 했는데, 니 땜에 느그 엄마 팔자가 저래 꼬였다 아이가?”

형곡국민학교 담벼락은 어른 키보다도 훨씬 더 높았다. 할머니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큰이모네 집에서 너무 멀어진 건 아닐까. 맛있고 싼 수박을 파는 가게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형곡국민학교 길고 긴 담벼락이 끝날 무렵, 장학문구점이 보였다. 문구점 앞에는 쭈쭈바를 먹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아이들 손에 들려있는, 입으로 쭐쭐 빨고 있는 빨간색 쭈쭈바, 연두색 쭈쭈바가 보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외할머니는 장학문구점 앞 노점 앞에 섰다. 수박이 줄 지어 서있다. 할머니는 이 놈, 저 놈 수박을 통통 두드려본다.
"할매요, 내가 골라주는 게 제일 맛있다. 오늘은 손녀딸도 왔는가봐. 요거 큰걸로."
과일장사 아저씨는 커다란 식칼을 날렵하게 휘두르며, 순식간에 삼각뿔 모양으로 수박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 한 잎 베어 먹고선 외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3천5백원에 팔던 건데, 오늘은 특별히 3천원만 주이소.”

커다란 수박 한통을 들고 다시 걸어 돌아오는 길은 더 멀고 더 더웠다. 장학문구점을 지나, 형곡초등학교 긴 담벼락을 지나, 삼일 슈퍼를 지나고, 과일가게 앞을 지나서 큰이모네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는 수박을 들고, 외할머니 뒤를 따라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야, 도박은 손 잘라도 못 고친다 하더라. 형부 포기하고 그냥 이혼해라. 응?”
선풍기 바람보다 더 빨리, 작은 이모의 목소리가 내 귀에 도착했다. 수박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엄마, 작은 이모, 작은 이모부, 큰 이모, 큰 이모부, 상원이, 준현이, 준식이가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때마침 선풍기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엄마는
“됐다. 그냥 버스타고 갈께. 진아, 가자.”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가만히 수박을 내려놓고 '안녕히계세요' 꾸벅 말없이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터미날 매점 앞에는 ‘딸기맛 쭈쭈바 1개 백원’ 이라고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201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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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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