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까톡!  "여보, 생일 축하해. 내가 지난주에 택배로 보낸 미역국 오늘 꼭 데워서 먹어요. 하필이면 여고동창생들이 이렇게 날을 잡아서, 당신한테 미안하게 됐네. 터키는 지금 점심시간이야. 아침에는 블루모스크에 갔었는데, 생각보다는 시시하더라고. 티비로 꽃할배들 여행 보는 게 훨씬 재밌어. 그래도, 터키 과일은 끝내주게 맛있다. 다음에는 꼭 당신이랑 같이 와야겠어."

사진속의 아내는 커다란 모스크 앞에서 썬그라스를 끼고, 하늘색 머플러를 하고 웃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Thank You 모양 이모티콘 중에 하나를 골라, 전송했다. 냉장고에서 지퍼백에 담긴 미역국을 하나 꺼냈다. 1인용 범랑냄비를 꺼내서, 우르르 미역국을 쏟았다. "생일이라고 소고기 미역국이군. 맨날 몸에 좋다고 홍합미역국만 끓여 보내서 질렸는데, 잘됐네." 치익. 까스불을 켰다.

띠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아빠, 생일 축하해."
"응, 고마워. 우리딸."
"지금 서영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지하철 타려고 뛰어가는 길이야. 미역국은 먹었어? 아, 벌써 지하철 들어온다. 길게 통화는 못하겠네. 아빠. 계좌로 용돈 좀 넣었으니깐, 맛있는 거 사드셔."
"그래, 늦겠다. 얼른 가." "응" 뚜뚜뚜.

미역국이 데워지는 동안, 새로운 문자를 확인했다.
"진낙휘 고객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5% 할인쿠폰을 넣어드리오니,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등산복 전문점 몽블랑]"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족과의 외식은 놀부보쌈 어떠세요? 매장 방문 시, 생일 음료가 서비스로 제공됩니다."

그는 '미역국엔 김장김치가 제일이지'라고 중얼거리며,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에 올리고, 미역국을 담은 국그릇에 밥을 한 주걱 넉넉히 퍼 담는다. 그가 혼자서 밥을 차려 먹은 것도 근 3년이 되어,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한 평생 몸담았던 우체국을 퇴직하던 날, 그는 아내에게 같이 양평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면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곳에 사는 것도 싫고, 좋으나 싫으나 그동안 마음 맞춰온 친구들이 있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연이라면, 석촌호수에서 산책만 해도 철마다 꽃보고, 나무보고 충분한데, 왜 시골에 내려가 사냐고 했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번 씩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그는 바로 옆 동에 살고 있는 딸과 외손주가 보고 싶어서, 한 달에 한번은 서울에 다녀왔다. 아내는 1년에 한번 그의 생일이 있는 주말에 딸과 사위, 손녀딸과 함께 양평집에 내려와, 밀린 이불빨래를 해주고 정신없는 하루를 지내다가 서울로 가곤했다.

‘오늘 중부지방은 대기 불안정으로 소나기가 오는 곳이 있겠고, 돌풍과 벼락을 동반하겠습니다. 남부지방은 맑은 가운데, 어제와 비슷한 기온 분포를 보이겠습니다. 올해 첫 단풍은 9월 25일경 설악산을 시작으로 10월 중순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됩니다.’ 늘 켜놓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창밖으론 맑은 하늘에 구름이 떠간다.

오늘은 화요일, 그가 복지관에서 탁구를 치는 날이다.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날마다 텃밭에서 소일거리를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지내는 일상이 제일 편하기는 해도, 일주일에 한번 복지관에서 노인네들을 만나 탁구를 치는 것도 전원생활의 낙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다행히 자리가 여럿 있었다. 그는 햇볕이 따뜻한 자리에 앉았다. 지난 새벽, 가을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탓인지, 흔들흔들 적당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버스에 앉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겨우 눈을 떠서 창밖을 확인해보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기사 양반, 여기가 어디우? 깜박 잠이 들었네.”
“다음이 상원계곡이예요”
정신을 차리고 확인해보니, 91번 버스다. 61번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91번 버스를 탔나보다. 그가 양평에 이사 온지 3년이 되었지만, 상원계곡은 처음이었다. 복지관 탁구는 새까맣게 잊은 듯. 그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산책로 옆으로, 노오란 마타리꽃이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고 있다. 좀 더 길을 따라 올라가니, 붉게 익기 시작하는 대추나무가 보였다. 풋대추를 몇 개를 따서, 입에 넣었다. 달큰한 대추향이 입안에 가득했다. 풋대추를 먹으면서, 그는 익숙한 고향 길을 걷듯이 계곡을 따라 걸었다.

계곡물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심조심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물이 맑다. 계곡 물에 손을 씻었다. 동글동글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낸다. 하얗고 동글한 조약돌 하나를 꼭 쥐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산국화의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메밀꽃밭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맞은편으로 알록달록 등산복을 맞춰 입은 중년 남녀들이 계곡을 내려오며, “어르신 얼른 집에 가세요. 소나기 온대요.”라고 이야기 한다. 그는 그제서야, 우산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 생각났다. 그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벌써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였다. 곧 빗방울이 떨어질 기세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산위에서부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후두두둑. 제법 굵은 빗방울이다. 다행히,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작은 카페가 하나 보인다.

“어르신, 많이 젖으셨네요. 얼른 들어오세요.”
남색 앞치마를 한, 카페 주인은 분홍색 타월을 건네준다.
“대충이라도 닦으시고요. 주문은 천천히 하세요”
“아이쿠, 고맙소.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면 좋겠네요.”
그는 카페 여주인이 내려주는 커피 소리가 따뜻한 빗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 동안, 감기 몸살을 앓았다. 그 사이, 아내는 터키에서 돌아왔다고 전화가 왔고, 주말에는 딸네 식구들과 함께 양평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는 3일째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실 수 있었다. 그의 라디오 앞에는 작고 동그란 조약돌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조약돌을 바라보면서, 꽤 괜찮은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끝)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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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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