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세트B 하나 주시고요. 냉모밀도 주세요.“

“일행은 몇 분 이세요?“

“일행 없고, 저 혼자 먹을 거예요. 메뉴 되는대로 빨리 주세요.”

“네.”



소설책을 꺼내 놓고, 메뉴를 기다렸다. 초밥세트B에는 유부초밥 하나, 새우초밥 하나, 광어초밥 둘, 연어초밥 하나, 한치초밥, 맛살초밥, 계란초밥이 나왔다. 유부, 계란, 새우. 이것들을 초밥이라고 부르기는 좀 미안하지 않나? 먼저 광어초밥을 먹었다. 말캉한 느낌의 광어와 꼬들하게 지어진 밥이 입안을 가득채웠다.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계란은 부드럽다기 보다는 스폰지같은 느낌이었다. 계란은 가벼운 느낌 말아졌는데, 크기가 커서 입안에 가득 찼다. 생새우초밥이라면 탱글탱글 했겠지만, 익혔다가 얼려둔 새우는 퍼석했다. 연어는 누군가의 혓바닥처럼 부드럽고 기름졌다. 한치초밥에 와사비를 조금 더 올리고 간장에 찍어 먹었다. 와사비의 향기에 코가 찡했다. 초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냉모밀이 나왔다. 무즙과 와사비를 살살 풀어줬다. 반쯤 얼린 육수의 얼음이 입 안에서 차갑게 서걱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 맛이 없을까?’ 혼잣말을 읊조리고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난 며칠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낀 것은 맛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감이었고, 온도였고, 냄새였을 뿐. 맛이 아니었다. 새콤, 달콤, 매콤한 맛, 그리고 고소한 맛, 짠맛, 싱거운 맛. 그 맛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불과 2주전, K와 이 식당에 왔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모밀정식과 초밥세트A를 먹었다. 광어지느러미초밥은 매끄럽고 고소했다. 고슬고슬한 밥과 어우러져서 간이 딱 맞았다. 유부초밥은 약간 달콤한 맛이었다. 모밀소바 무즙은 매콤했고, 소바 간장은 짭짤했다. 레몬을 한 조각 넣은 얼음물은 싱그러웠다. 그와의 섹스는 또 어떠했나. 초밥을 먹은 그의 입술에서는 옅은 생강 맛이 났다. 그는 항상 내 가슴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동안 그 냄새와 맛에 취해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간지럽혔고, 그의 정수리에서는 잘 발효된 와인향이 났다. 그의 팔뚝에서는 바다를 닮은 짭짤한 땀내가 났다. 서로의 냄새를 사랑했고, 서로의 몸에서 짜고 달콤하고 비릿한 맛을 찾아내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그도 없었고, 그와 함께 느꼈던 맛도 없어졌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처음 싸웠던 이유를 기억할 수 없다.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몇 번의 말다툼이 드러낸 낯선 얼굴이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억울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아니었다. 귀찮음, 지겨움, 체념, 멸시. 아니다. 그것은 낯선 눈빛과 말이 아니었다. 아빠가 나를 떠나던 날, '내가 뭘 얼마나 잘 못했다고 그래? 정이라곤 없는 년‘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날의 그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난 27년간 수없이 마주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K에게서 그 낯익은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떠나기 전에 내가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 드셨으면, 후식 드릴까요? 녹차나 더치커피 가능해요.”

“네, 커피로 주세요.”



차가운 더치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갔다. 단단한 얼음을 와자작 깨물어 먹었다. “맛을 잃었지만, 버림받지 않았으니 괜찮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산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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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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