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친구들>


얼마 전, 친구 부부가 작은 가게를 열었다. 직접 구운 카스테라 한 접시에 담담하게 내린 커피 한잔, 우유 한잔.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메뉴다. 하루 장사를 끝내고 다시 빵반죽을 하고 내일 팔 카스테라를 굽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카스테라처럼 보드라워졌다. 날마다 걸레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빵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뜰을 가꾸는 친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이 40세. 그렇다. 불혹(不惑), 미혹되지 않는 나이, 마흔이 되었다. 물론 나는 공자가 아니니, 하루에도 수십 번 혹한다. 혹하기도 하고,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 칭찬 한 마디에 혹 하기도 하고, 여덟 살 아이가 던진 ‘엄마, 싫어.’ 한마디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30년 가까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책을 읽는 ‘할머니 독서모임’이 있다. 불혹의 나이에 모이기 시작하셨는데, 이제는 할머니들이 되셨다. 


첫 모임은 1985년 어느 목요일에 있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무려 30년 동안 두어 번 정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쉬었을 뿐이다. 한때 스무 명에 이르렀던 회원이 지금은 다섯으로 고정되었다. 가끔씩 마을에 새로 온 젊은 처자들 한둘이 소문을 듣고 드나드는 정도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처럼 마르지 않는 이 한결같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일까? 홍 사모님이 살짝 웃으면서 말한다.

“사실 쭉정이들만 남은 거예요. 똑똑한 이들은 바빠서 모두 제 일들 하러 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공부할 겸 매주 나와서 책을 읽은 거예요. 머리가 좋아서 정리해서 발표하지는 못하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게 그저 좋았습니다.” 

(2015년 7월 14일 한국일보 '불혹에 만나 칠순 훌쩍… 책 덕분에 평생 벗으로 살죠.' 기사 중에서)


할머니들은 열 권짜리 우찌무라간조 전집을 다 읽으셨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다 읽고 하동으로 역사기행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시골 작은 식당에서 밥을 하시거나,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모여서 책을 읽어 오신 할머니들이다. 스스로를 쭉정이라고 말하시지만, 그 자리를 30년 동안 지켜 온 알곡 중에 알곡이다. 


지난 해, 도서관에서 ‘우리마을 사람책, 그녀들의 홍동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마을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을에서 40년간 미용실을 해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용사 할머니는 첫아이를 낳으러 시댁에 내려왔다가, 마을에 눌러 앉게 되고 결혼 전에 했던 미용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40년 동안 자신에게 머리를 맡겨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오래 미용실을 할 줄은 당신께서도 모르셨다며. 


그들이 70살까지 책을 읽자, 40년 이상 미용실을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날 미용실에 온 손님의 머리를 정성껏 말아드리고 이번 주에 같이 읽기로 한 책을 계속해서 읽었을 것이다. 때로는 날이 궂고 서로 감정이 상해도 약속을 지키고 그 자리를 지킨 하루하루가 모여서 30년이 되고, 40년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라져가는 토종씨앗을 모으고 그 씨앗을 평생 심고 기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청년이 있다. 철을 따라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고 다시 씨앗을 갈무리한다.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고 안정된 월급을 받을 수도 없지만 날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뿐만 아니라, 어디든 불러 주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만드는 친구, 날마다 같은 시간에 직장으로 출근하는 친구, 매년 텃밭일지를 만들고 꼼꼼히 농사기록을 채워 나가는 친구… 


마흔이 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흔한 자격증 하나 없고 여전히 어떻게 살지, 뭐 하고 살지 고민 많은 나를 보면 답답하다. 하지만 일상의 자리를 지키며 매일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볼 때 마음이 놓인다.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겨울 밭은 고요하다. 언뜻 보면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고요한 밭에서 겨울을 보낸 밀, 보리, 양파, 마늘은 봄이 되면 튼튼하게 자란다. 그 자리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요한 겨울 밭이 없이는 열매도 없다. 씨를 품고 추위도 바람도 햇볕도 담담히 겪어내는 겨울 밭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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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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