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까톡!  "여보, 생일 축하해. 내가 지난주에 택배로 보낸 미역국 오늘 꼭 데워서 먹어요. 하필이면 여고동창생들이 이렇게 날을 잡아서, 당신한테 미안하게 됐네. 터키는 지금 점심시간이야. 아침에는 블루모스크에 갔었는데, 생각보다는 시시하더라고. 티비로 꽃할배들 여행 보는 게 훨씬 재밌어. 그래도, 터키 과일은 끝내주게 맛있다. 다음에는 꼭 당신이랑 같이 와야겠어."

사진속의 아내는 커다란 모스크 앞에서 썬그라스를 끼고, 하늘색 머플러를 하고 웃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Thank You 모양 이모티콘 중에 하나를 골라, 전송했다. 냉장고에서 지퍼백에 담긴 미역국을 하나 꺼냈다. 1인용 범랑냄비를 꺼내서, 우르르 미역국을 쏟았다. "생일이라고 소고기 미역국이군. 맨날 몸에 좋다고 홍합미역국만 끓여 보내서 질렸는데, 잘됐네." 치익. 까스불을 켰다.

띠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아빠, 생일 축하해."
"응, 고마워. 우리딸."
"지금 서영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지하철 타려고 뛰어가는 길이야. 미역국은 먹었어? 아, 벌써 지하철 들어온다. 길게 통화는 못하겠네. 아빠. 계좌로 용돈 좀 넣었으니깐, 맛있는 거 사드셔."
"그래, 늦겠다. 얼른 가." "응" 뚜뚜뚜.

미역국이 데워지는 동안, 새로운 문자를 확인했다.
"진낙휘 고객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5% 할인쿠폰을 넣어드리오니,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등산복 전문점 몽블랑]"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족과의 외식은 놀부보쌈 어떠세요? 매장 방문 시, 생일 음료가 서비스로 제공됩니다."

그는 '미역국엔 김장김치가 제일이지'라고 중얼거리며,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에 올리고, 미역국을 담은 국그릇에 밥을 한 주걱 넉넉히 퍼 담는다. 그가 혼자서 밥을 차려 먹은 것도 근 3년이 되어,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한 평생 몸담았던 우체국을 퇴직하던 날, 그는 아내에게 같이 양평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면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곳에 사는 것도 싫고, 좋으나 싫으나 그동안 마음 맞춰온 친구들이 있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연이라면, 석촌호수에서 산책만 해도 철마다 꽃보고, 나무보고 충분한데, 왜 시골에 내려가 사냐고 했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번 씩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그는 바로 옆 동에 살고 있는 딸과 외손주가 보고 싶어서, 한 달에 한번은 서울에 다녀왔다. 아내는 1년에 한번 그의 생일이 있는 주말에 딸과 사위, 손녀딸과 함께 양평집에 내려와, 밀린 이불빨래를 해주고 정신없는 하루를 지내다가 서울로 가곤했다.

‘오늘 중부지방은 대기 불안정으로 소나기가 오는 곳이 있겠고, 돌풍과 벼락을 동반하겠습니다. 남부지방은 맑은 가운데, 어제와 비슷한 기온 분포를 보이겠습니다. 올해 첫 단풍은 9월 25일경 설악산을 시작으로 10월 중순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됩니다.’ 늘 켜놓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온다. 창밖으론 맑은 하늘에 구름이 떠간다.

오늘은 화요일, 그가 복지관에서 탁구를 치는 날이다.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날마다 텃밭에서 소일거리를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지내는 일상이 제일 편하기는 해도, 일주일에 한번 복지관에서 노인네들을 만나 탁구를 치는 것도 전원생활의 낙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다행히 자리가 여럿 있었다. 그는 햇볕이 따뜻한 자리에 앉았다. 지난 새벽, 가을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탓인지, 흔들흔들 적당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버스에 앉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겨우 눈을 떠서 창밖을 확인해보니.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기사 양반, 여기가 어디우? 깜박 잠이 들었네.”
“다음이 상원계곡이예요”
정신을 차리고 확인해보니, 91번 버스다. 61번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91번 버스를 탔나보다. 그가 양평에 이사 온지 3년이 되었지만, 상원계곡은 처음이었다. 복지관 탁구는 새까맣게 잊은 듯. 그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산책로 옆으로, 노오란 마타리꽃이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고 있다. 좀 더 길을 따라 올라가니, 붉게 익기 시작하는 대추나무가 보였다. 풋대추를 몇 개를 따서, 입에 넣었다. 달큰한 대추향이 입안에 가득했다. 풋대추를 먹으면서, 그는 익숙한 고향 길을 걷듯이 계곡을 따라 걸었다.

계곡물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심조심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물이 맑다. 계곡 물에 손을 씻었다. 동글동글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낸다. 하얗고 동글한 조약돌 하나를 꼭 쥐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산국화의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메밀꽃밭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맞은편으로 알록달록 등산복을 맞춰 입은 중년 남녀들이 계곡을 내려오며, “어르신 얼른 집에 가세요. 소나기 온대요.”라고 이야기 한다. 그는 그제서야, 우산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 생각났다. 그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벌써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였다. 곧 빗방울이 떨어질 기세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산위에서부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후두두둑. 제법 굵은 빗방울이다. 다행히,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작은 카페가 하나 보인다.

“어르신, 많이 젖으셨네요. 얼른 들어오세요.”
남색 앞치마를 한, 카페 주인은 분홍색 타월을 건네준다.
“대충이라도 닦으시고요. 주문은 천천히 하세요”
“아이쿠, 고맙소.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면 좋겠네요.”
그는 카페 여주인이 내려주는 커피 소리가 따뜻한 빗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 동안, 감기 몸살을 앓았다. 그 사이, 아내는 터키에서 돌아왔다고 전화가 왔고, 주말에는 딸네 식구들과 함께 양평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는 3일째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실 수 있었다. 그의 라디오 앞에는 작고 동그란 조약돌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조약돌을 바라보면서, 꽤 괜찮은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끝)

 


2015-06-22

 

수박과 쭈쭈바

 

“진아, 자유시간 먹을래?”
“응. 엄마는?”
“오랜만에 연양갱 먹어야겠다.”
엄마는 자유시간과 연양갱을 하나씩 집어들고, 천원짜리 한장을 내민다.
“얼마예요?”
“5백원입니다.” 매점 아저씨는 검은 비니루 봉지에 물건을 집어넣고, 잔돈 5백원과 함께 돌려준다.

시외버스에 올라타니, 멀미가 날 것 같은 쾌쾌한 기름냄새가 진동한다. 15번 자리 아줌마 옆을 지나자,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엄마와 나는 17, 18번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창 쪽 자리다. 시외버스는 순식간에 번잡한 대구 도심을 빠져나갔다.

“옛날에 50원하던 연양갱이 더 맛있다. 3백원으로 올랐는데, 더 작아지고 맛도 없다.”
나는 50원짜리 연양갱을 먹어본 적도 없고, 3백원짜리 연양갱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건 엄마의 음식. 한번도 입에 대본적 없는 엄마의 간식이다.

자유시간을 한입 베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끈적이는 카라멜 사이로 땅콩이 오도독 씹힌다. 우물우물 천천히 씹어먹는다. 집에서 가지고 온 보리차를 한모금 마시고. 자유시간을 한입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
 
“외할머니 생신이가? 아닌데. 외할머니 생일은 홍시 나오는 가을이잖아. 이모집에 왜 가는데?”
엄마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창밖으로는 회색의 도로와 똑같이 찍어낸 듯 한 빨간 양철지붕 시골집들이 보인다. 썩은 어금니 사이로 자유시간 땅콩이 꼈다. 혓바닥으로 살살 밀어내 보지만, 땅콩은 쉽게 나오려 하지 않는다.

“구미 공단 나오세요. 공단입니다. 터미날은 다음에 내리세요.”

“내리자.”
엄마는 오른손에는 차표를 들고, 왼손에는 쓰레기를 담은 까만 비니루 봉지와 지갑을 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큰이모부가 서있다. 그 사이 배가 조금 더 나온 것 같다.
“처형, 어서 오이소. 진아, 잘 지냈나. 버스 타고 오느라 심심했제. 쩌기에 우리차 세워 놨다. 지난봄에 뽀나스 나와가, 하나 샀십니다. 프라이드라고 광고 봤제? 쩌기 회색차 보이졔? 저거 타고 집에 드갑시다.”

이모부가 문을 열어줘서 얼른 회색차에 올라탔다. 프라이드? 프라이드? 혼자서 중얼거려보는데, 어금니 사이에 땅콩이 다시 거슬린다. 프라이드는 좀 답답하다. 버스보다 천장도 낮고, 창문도 닫혀있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는 다 타봤는데, 프라이드는 처음이다. 실은 택시도 타 본적이 없다. 답답하게 느껴져 창문을 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창문은 어떻게 여는거지? 전혀 감이 안온다. 얼떨결에 타기는 했는데, 내릴 때 차문을 어떻게 열지? 저 손잡이를 돌려야 할까? 엄마는 차문을 열수 있을까? 귓속말로 물어볼까? 눈알을 굴리며, 혓바닥으로 땅콩을 밀어내며 걱정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큰이모집에 도착했다. 나의 예상과 달리, 엄마는 단박에 프라이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모네집 거실에는 내 키만한 선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거실에는 큰이모, 작은 이모, 작은 이모부가 앉아있다, 베란다 앞에는 8살 상원이, 5살 준현이, 3살 준식이가 플라스틱 블록을 맞추다가, 엄마와 나를 힐끔 쳐다본다.
 
“언니야, 내 못산다. 우짤라고 그카노? 얼마라고? 오백만원?”
큰이모는 인사도 안하고 엄마에게 질문을 쏟아낸다.
“처형이 무슨 죄가 있노? 앉아서 찬찬히 들어보자.”
큰이모부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뿌드득 뿌드득 씹어 먹으며 선풍기 앞에 앉는다. 우리집 방문보다도 큰 냉장고가 거실 한쪽에 서있다. 나는 샌달에 버클을 풀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큰이모가 나를 부른다. “진아, 진이는 외할머니랑 나가서, 수박 한덩이 사온나.”
샌들 버클을 풀고 있던 나는 버클을 다시 조였다. 외할머니가 손바닥 만한 지갑을 챙겨서 나온다.
“진아, 수박 사러 가자.”
나도 시원한 선풍기 바람 쐬면서, 블록놀이 해보고 싶은데. 속으로만 말해본다. 골목을 쭉 걸어나오니, 횡단보도가 있다. 횡단보도 옆에는 과일 가게가 있다.
“할머니, 저기 수박 있다.” 했는데,
할머니는 “저 집은 맛없고 비싸기만 하다. 이리 온나.” 라고 말하며, 앞서 걷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과일가게 앞을 지나고, 삼일슈퍼를 지나고, 형곡국민학교 교문이 보인다. 등에는 땀이 흥건하고, 샌들 안으로 모래가 들어와 까끌거린다. 외할머니는
“니 애비는 지금 어딨노?”
“집에 있어요.”
“또 술쳐먹었나. 니 땜에 느그 엄마가 이 고생을 한다. 그때 니 버리고 모질게 나왔어야 했는데, 니 땜에 느그 엄마 팔자가 저래 꼬였다 아이가?”

형곡국민학교 담벼락은 어른 키보다도 훨씬 더 높았다. 할머니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큰이모네 집에서 너무 멀어진 건 아닐까. 맛있고 싼 수박을 파는 가게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형곡국민학교 길고 긴 담벼락이 끝날 무렵, 장학문구점이 보였다. 문구점 앞에는 쭈쭈바를 먹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아이들 손에 들려있는, 입으로 쭐쭐 빨고 있는 빨간색 쭈쭈바, 연두색 쭈쭈바가 보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외할머니는 장학문구점 앞 노점 앞에 섰다. 수박이 줄 지어 서있다. 할머니는 이 놈, 저 놈 수박을 통통 두드려본다.
"할매요, 내가 골라주는 게 제일 맛있다. 오늘은 손녀딸도 왔는가봐. 요거 큰걸로."
과일장사 아저씨는 커다란 식칼을 날렵하게 휘두르며, 순식간에 삼각뿔 모양으로 수박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 한 잎 베어 먹고선 외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3천5백원에 팔던 건데, 오늘은 특별히 3천원만 주이소.”

커다란 수박 한통을 들고 다시 걸어 돌아오는 길은 더 멀고 더 더웠다. 장학문구점을 지나, 형곡초등학교 긴 담벼락을 지나, 삼일 슈퍼를 지나고, 과일가게 앞을 지나서 큰이모네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는 수박을 들고, 외할머니 뒤를 따라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야, 도박은 손 잘라도 못 고친다 하더라. 형부 포기하고 그냥 이혼해라. 응?”
선풍기 바람보다 더 빨리, 작은 이모의 목소리가 내 귀에 도착했다. 수박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엄마, 작은 이모, 작은 이모부, 큰 이모, 큰 이모부, 상원이, 준현이, 준식이가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때마침 선풍기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엄마는
“됐다. 그냥 버스타고 갈께. 진아, 가자.”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가만히 수박을 내려놓고 '안녕히계세요' 꾸벅 말없이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터미날 매점 앞에는 ‘딸기맛 쭈쭈바 1개 백원’ 이라고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2015. 6. 8)


슬플 때는 입꼬리가 내려가고, 반대로 행복할 때는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화가 날 때는 입 주변에 힘을 꽉 주거나 양미간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보편적인 표정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표정만 보고 아이의 감정을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표정으로 감지한 감정에 확신을 가지면 오히려 감정코칭이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볼 때는 "지금 화났어?"와 같은 닫힌 질문이 아니라 "지금 기분이 어때?"와 같은 열린 질문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화났어?"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예", "아니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분이 어때?"라고 물으면, "졸려요", "짜증이 나요", "답답해요", "내일 시험 못 볼 것 같아 걱정돼요", "불안해요", "외운 것을 머릿속으로 반복해보고 있는 중이에요" 등 많은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177,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발바닥 소설2] 죽음에 관하여.

 


소설 하나를 완성하고 죽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쓴단 말인가. 소설은 너무 비장하거나 우울하여서는 안된다. 소설은 유쾌하고 그러면서 마음에 뭐하나 남겨주는 희망 같은 것을 담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설령 혼자 죽어버리더라도. 그녀가 완전히 희망을 버린것은 아니었다고. 죽음 가운데 희망을 기다렸다는 헛소리를 해줄 인간이 몇은 생기지 않겠는가. 유쾌하고 희망이 있으나, 철없이 밝지만은 않은 소설을 구상하던 나는 담배 생각에 복도로 나왔다. 그 순간 새 한마리가 퍼드덕 퍼드덕 거리더니, 하늘로 향한 유리창에 머리를 딱 박고서는, 퍽 떨어지더니, 죽었다.

불쌍해서 눈물이 나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작은 새를 재활용에 내놨던 박스 두개로 간신히 바깥으로 옮겼다. 아무리 불쌍해도 주검이 된 새를 맨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시 기절한 게 아닌가 하고 담배 두개를 피우는 동안 기다렸으나,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에 조금 옆으로 굴러가 버렸다. 서둘러 땅을 팠다. 삽으로 새의 주검을 땅에 묻고 흙으로 덮어주었다. 막 꽃망울이 터진 매화꽃 하나를 꺽어 무덤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와 차가운 물을 마시고 소설을 써 내려갔다. 불쌍한 새를 생각하니 글이 술술 써진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낮게 날아 자세히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것을 보게 될까 흥분되는 아침이었다. 백합나무에 둥지를 튼 박씨네 새끼들 소리에 잠이 깼다. 박씨는 첫 새끼들을 낳고, 하하 실은 알을 낳아 애지중지 열아흐레를 품었다. 박씨부인은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오던 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박씨는 혼자서 새끼들 먹일 먹이를 잡아오고, 밤에는 따듯하게 새끼들을 품어줬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둥지를 트고 홀애비 몸으로 새끼들을 키워내는 박씨는 참으로 대견하다. 겨우내 얼었던 호박을 발견한 날에는 꼭 박씨를 불렀다. 호박은 물컹하여 먹을 것이 못되어도, 호박씨는 이런 보릿고개에 꽤나 든든한 양식꺼리가 된다. 나는 혼자 사는 몸이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꼭 박씨네와 나누어먹는다. 오늘은 먹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탐험을 해야지. 새대가리라는 말은 얼토당토 않은 말임을 증명해 보이리라. 라는 생각으로 하얗고 커다란 네모 안으로 들어갔다. 탐험을 끝내고 나오려는 찰라. 아이쿠, 길을 잃었다. 아하, 저기가 하늘이구나 하며 힘차게 날아오르는데. 딱, 퍽. 그리고 눈 앞이 아득해졌다."라고 문장을 마구 갈겨 적었다. 손가락에서 예술혼이 뿜어져나왔다. 역시 생명을 잃은 고통 뒤에 창작이 시작되는구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 박새의 이야기 * *

저 인간은 왜 나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오늘의 죽음에 무척 만족한다. 삶의 어떤 순간보다도 만족스러운 죽음. 나는 오늘 죽기로 결심했다. 비루한 인생. 유리문에 세차게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죽음이었다. 박새따위를 놀잇감으로 생각하는 고양이의 밥이 되지도 않았고. 잘난체 하는 독수리에게도 잡히지 않았다. 먹을 것을 찾아 하루종일 뱅뱅 하늘을 나는 것도 지겨웠고. 하나같이 찍찍찍찍 돌림노래처럼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도 지긋지긋했다.

바로 오늘. 내가 죽기에 딱 알맞을 곳을 찾았다.
있는 힘껏 딱.
퍽.
그리고 끝이었다.

머리를 한번 부르르 떨고서는 죽었다. 아픔은 잠시, 더군다가 엄마 아빠 형제 남편 자식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박에 죽을 수 있어, 생애 최초로 신께 감사했다. 다행히 할일없는 아줌마 앞에 딱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녀는 나를 땅에 묻어주었고, 매화꽃 하나를 무덤에 꽂아주었다. 이만하면 내가 그동안 꿈꾸던 바로 그 죽음이었다. 후회도 배신도 없는 딱 나에게 적당한 죽음이었다.

 

 

 

[발바닥 소설2] 죽음에 관하여.

가슴의 털을 다 뽑았다. 보드라운 가슴 털을 뽑아, 이불을 만들었다. 바알간 가슴이 드러났다. 끙끙끙 발정 난 소리를 내며 유난히도 짝짓기에 힘을 쏟던 그해. 봄은 이불 같은 털 한 뭉치와 함께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갇혀 있는 신세에도 그렇게 열심히 끙끙거리며. 내가 여기 살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털을 뽑아 이불을 만들고, 새로 태어날 새끼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살고 있다고. 온 존재로 외치고 있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마. 아무런 다짐도 하지 마.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사는 거야.” 라이터를 켜며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달이 없다.” 현정은 담배 연기를 날리며, 말을 툭 내뱉는다.
“웃기고 있네. 달이 네 눈에 안 보이는 거지. 달이 없기는?” 그녀는 담배 한 모금 깊이 마신다.
“내 눈에 안보이면, 없는 거지. 내일 살게 될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 눈에 안보이면 없는 거야”

자그마한 상자 안은 털로 가득 찼다. 털은 이불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고, 가림막이 되었다. 꼬물꼬물 작은 생물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내지 않고 자라났다. 대신 그 어미는 끙끙 소리를 내며, 배고프다고 빨리 뭐라도 달라고 울어댄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무 하나, 양배추 하나, 사과껍질이라도 먹을 수 있다. 울어야 한다. 울어야 내 새끼를 키워낼 젖이 나온다. 먹은 만큼 젖이 차오르고, 젖이 차오른 만큼, 새끼의 배도 가득 찰 것이다. 그것이 살이 되고, 털이 되고, 발바닥이 되고, 또 그 새끼의 젖이 될 것이다.

“내가 살아 볼라고, 젖을 물렸지. 마구마구 그 조그마한 입에 내 젖을 물렸어. 다 내가 살자고 하는 짓이지. 그래도 그 조그만 입도 살아보겠다고 아구아구 빨아 먹더라고. 그게 고마웠지” 맥주잔을 채우던, 현정이 말했다.

새끼를 가져 한껏 부풀었던 몸은 바람 빠진 공처럼 주글주글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끼를 낳아본 자는 알고 있다. 낳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것을. 새끼 빠진 몸은 빨래같이 축축 쳐지지만, 젖을 품은 가슴만은 빵빵하다. 터질듯이 차오른다. 태어난 새끼는 살기 위해 젖을 찾는다. 낳은 어미도 살기 위해 젖을 물린다. 태어나고 낳았으나. 그들은 같은 처치이다. 각자가 살기 위해. 젖을 빨고, 젖을 물리는 그 순간도 결국은 각자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

“현정아, 드디어 나왔다.” 털로 만든 문에 구멍이 생겼고, 작은 상자 앞에는 아직 발걸음이 서툰 새끼 토끼 세 마리가 그녀를 바라본다. 현정은 서툰 낫질로 민들레, 씀바귀, 쑥, 냉이를 눈에 보이는 대로 슥슥 잘라와 토끼장에 넣어준다. 어미, 애비 토끼가 정신없이 풀을 먹는 사이, 새끼 토끼를 하나씩 꺼내어 클로버가 소복한 밭 한 켠에 내려놓는다. 현정이 뒤돌아 담배 한대를 다 피우는 동안, 토끼들은 낯선 클로버 풀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겨울을 지내고, 봄동으로 다시 살아보려 하는 배추 하나를 무심히 뽑아, 토끼장에 툭 던져준다. 새끼 토끼들도 살포시 다시 토끼장에 넣는다.

살아야 했다. 울어야 했다. 살기 위한 울음은 너를 살렸다. 나를 살렸다. 터져 나온 울음은 서로에게 이불이 되었다. 이불속에서 나는 울었고, 그 울음은 더 두터운 이불이 되었다.

“이건 무슨 꽃이야?” 그녀가 물었다. “음, 개망초.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지” 현정은 풀을 자르던 낫을 푹 던지고는, “아, 힘들어서 못하겠다.” 라고 말하며 토끼장 문을 열어젖힌다. 이제 어른 손바닥 하나 만큼 자란 새끼토끼들이 토끼장 밖으로 폴짝! 풀이 잔뜩 올라온 밭으로 토끼들이 뛰어간다. 현정은 차가운 물 한잔을 꿀꺽꿀꺽 마신다. 밭 여기저기 토끼들이 봄볕에 반짝인다.  (끝)

 

 

[발바닥소설 1] 그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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