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자기, 둘째는? 이제 슬슬 나아야지. 아이가 혼자면 가엽잖아.’ 외동딸로 자란 나는 ‘혼자라서 외롭겠다. 가엽다’ 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고 자랐다. 나는 집에서 혼자서 노는 것도 재미있었고, 단지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형제들이랑 노는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어른들은 나에게 이런 식의 편견을 담아 내 감정을 짐작하는 듯한 말을 하곤 했다. 상대방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위로도 아니고, 내 마음을 읽어주는 말도 아닌 선입견으로 시작된 말. 나도 그런 말을 쏟아낼 때가 참 많다. 우리가 대화라고 하는 말 중에, 또는 독백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참 많은 이야기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딸로 등장하는 ‘리나’처럼, 있는 그대로 마음을 읽어주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궁금한 것을 솔직히 묻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직장여성와 전업주부, 비혼과 기혼, 스무살과 서른살, 장래희망과 주어진 일, 딸과 엄마… 이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 티비에서 봐온 전형적인 이미지가 머리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꽃 같은 스무살을 넘어, 뭔가 안정된 삶을 누릴 것 같은 서른 살도 지났다. 서울에서 야근을 밥 먹듯하는 커리어우먼으로도 살아보았고, 시골에서 하루 세끼 남편 밥 차려주는 주부로도 살아왔다. 희망했던 직장에도 들어갔었고,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와 결혼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어쩌면 질문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리나’의 말을 다시 되새겨본다. ‘그럼, 엄마는 지금 뭐지? 투명인간? 엄마는 여기 확실하게 있는데도 이상한 말을 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이미 ‘있다’. 나도 이미 있다. 다행히 투명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비혼이 결혼을 하면 얻게 되리라 생각하는 안정감도, 주부가 직업을 가지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모두 허상일 뿐이다. 허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도, 남을 판단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이 책은 만화책이지만, 정말 있을법한,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고 생각해봤을 이야기로 실마리를 풀어낸 책이다. 고모의 외로움과 불안함도 공감이 가고, 엄마의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도 공감이 간다. 이 두사람에게 외로움, 불안함, 공허함을 그냥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두 사람의 생활도 조금 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둘 다,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솔직해 질 수 있는 친구가 된다면, 삶은 조금 더 풍성해질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철저히 사람간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부탄연구센터 카르마 우라 소장의 말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직업이나, 결혼, 출산, 사회적 지위가 아닐 것이다. 그 관계들 속에서 얻고 싶은 ‘행복’일 것이다. 부탄 사람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실제로 행복하다면, 그것은 그들은 가족, 이웃, 자연, 신과의 관계에서 행복하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관계를 잘 맺고, 관계를 잘 키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부모님과, 마을 이웃들과, 어르신들과, 토끼와, 닭과, 꽃과 나무와, 벼와 관계를 잘 맺고, 그 안에서 행복하고 싶다. 

 

‘행복한 나라 부탄의 지혜’ 이 책은 부탄의 현실을 쓴 책인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소설에 나올 법한 무릉도원 같은 이상세계로 다가왔다. 만화책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라는 책은 눈물이 핑돌면서 읽었고, ‘행복한 나라 부탄의 지혜’는 크크 웃으면서 읽었다. 첫눈 오는 날은 공휴일이라니, 놀랍고 재미있다. 


부탄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종교나 전통적인 옷과 집을 통해서 많은 부분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고,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지금의 삶은 잠깐이며, 누구도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다’, ‘지금의 삶은 일시적이고 사후에는 내세가 존재한다’라는 불교의 확고한 가르침이 부탄을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뿌리가 아닐까? 그러한 뿌리 없이 흔들리는 나와 같은 사람이 고민하며 흘려 보낸 시간에 부탄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숲을 가꾸며 행복을 누렸을 것만 같다. 


너무나 다른 배경에서 살아와서 인지, 책의 내용이 믿기지 않는 것이 많다. 실제로 부탄사람들이 이렇게 욕심 없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종교가 권력이나 시장경제로부터 자유로운지 무척 궁금하다. 그리고 한편에선 ‘공동의 행복’이라는 훌륭한 목표를 가지고 실천하고 있는 작은 나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느껴진다. (끝)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 마스다 미리.

행복한 나라 부탄의 지혜 -사이토 도시야, 오하라 미치요 글. 홍성민 옮김. 양승구 사진.

[좋은과거 모임]


테리 이글턴이 쓴 <신을 옹호하다_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를 읽고.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이었지 필요가 아니다. ...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 사실의 증거다. (19)

아이들은 태어날 때의 이야기나,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한다. 이것은 내 삶의 근본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이고, 이유 없이 주어진 내 삶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찾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고등교육을 마친 나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적인 개념으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세포분열이 일어나면서 장기가 생겨나고 결국 인간이 생겼단다’ 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서 서로 몸과 마음을 맘껏 사랑하면서 아기가 만들어졌지. 라고 설명해주는 것이 어쩌면 더 사실에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한 명의 아기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엄마, 아빠가 사랑으로 몸을 합쳤다는 증거일 뿐, 한 명의 사람이 필요해서 그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랑을 하고, 섹스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도킨스는 근본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직설적 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의 토양이 되는 불안감과 굴욕감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인데도 말이다. (91)

서울에서 4년간 일했던 직장, 기독교 구호단체가 떠오른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편인 것처럼 광고하고 후원금을 모으지만 실상은 과연 가난한 사람들의 편인지 의심스러웠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조차 없으면서, 아프간전쟁 이후나 이라크 전쟁 후에 재건에 뛰어 들 때 그들의 논리는 참 허접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천박한 자본주의 그 자체이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듯, 스스로를 숭고한 존재로 드러내는 추악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삶과 죽음은 끝내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회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38)

믿음이란 본디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을 뜻하는데, …. 내가 이해하는 바의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 어둠과 고통과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55)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을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는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 나는..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109)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 이유는 저자 테리 이글턴이 적나라하게 기독교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이야기해주는데,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도 관념적으로는 너무나도 완벽하지만, 실제 인간은 악하고 모순되었기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잣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능숙하지만, 삶으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독교를, 예수를 붙들고 있다. 예수를 내려놓지 못한다.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지금시간’이라는 한 순간이라도 예수를 쫓아 살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찰라 같은 ‘지금시간’이라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메시지를 실현해보려는 마음. 그리고 사랑을 이유로 나를 창조한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의 존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125) 진보는 가장 노골적이고 기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즉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야 하고, 고문도 없어야 하며, 아우슈비츠도 없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보라는 개념은 거짓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126)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상당 부분 겹쳐진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 이상’의 것이지 ‘사회주의에조차 못 미치는’ 어떤 게 아니다. (김규항 – 226)


(2013-03-30 / 최수영/ 좋은과거모임) 




 살아야 하는 이유. 사실 내가 항상 궁금해왔던 바로 그 질문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읽기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니 왜 살아있는지를 고민할수록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일단 접어두자, 그냥 일상을 주어진 몫을 감당하며 살자고 다짐하곤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고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극도의 신경증에 시달려 결국 자살을 선택한 아들. 일본의 대지진과 핵발전소로 사라진 2만여명의 사람들과 불모의 땅. 그것을 앞에 두고 강상중 교수는 글을 써내려간다. 아마, 저자 스스로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내 삶은 왜 이리 찌질해 보이는가?’ 몇달 전 우울함에 휩싸였을 때 했던 생각이다. 사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면, 우울한 시간들이 많았고, 그만큼 내 삶의 목표는 ‘행복’이었다. 불안정한 부모가 가져다 준 우울함,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며든 우울함, 존재 자체의 불안함에서 온 우울함을 주기적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물론 우울의 끝에는 ‘왜 살아야 하나?’ 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나의 우울함의 근원에는 고독이 있었다. 

 ‘다들 신사들처럼, 숙녀들처럼 세련되게 교제하고 있었지만 마음을 터놓는 신뢰감이나 단란함, 따뜻한 사랑이 부족하고 자의식 과잉에 의한 긴장과 고독과 살벌한 느낌만 있었던 것입니다. (p49. 왜 이토록 고독한가)

 이 책에서 ‘왜 이토록 고독한가’에 대해 파헤치는데, 그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신과의 관계, 종교에서 분리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했으나, 이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아와 관련된 것을 스스로 생각하며 의미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통찰이다. 마음 의지 할 곳을 열심히 찾는 분리된 개인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어필하고 싶다는 아주 강한 자기 현시욕을 갖고 있는데도 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나’로 초연하게 있을 수 없고, 타자의 시선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며, 그 결과 신경과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p73)

 자신과 바깥 세계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 비유해서 말 하자면 그것은 ‘지평의 상실’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지평’을 잃어버렸으므로 심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불안감이 덮치는 것입니다. (p74)

 지난 몇 년 간, 남편과 싸울 때 대부분 마지막 하소연은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지만, 나는 나의 삶이 없어.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였다. 육아와 귀촌이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나는 속을 터놓을 친구도 없고 나의 존재를 실현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붕 떠있는 존재만 같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부정이 그 바닥에 깔려 있었다. 


 시작할 수 있을까?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이 파탄 나기 직전까지 철저하게 생각했습니다. ...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p121) 

 3월 11일의 경험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몇 번이고 좌절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철저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실패를 망각하는’ 방법만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p125) 

 이제껏 나는 삶의 고민과 우울, 고독을 철저히 맞서지 못했다. 아마도 고민, 우울, 고독 뒤에 떡 버티고 있는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강상중교수의 말대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달을 때에만, 다시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믿는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고,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 같은 것이 뚝 끊어지고 의미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저 혼자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의미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p134)

나는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 본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아들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이제껏 사랑이라고 말했던 것은 어쩌면, 나를 사랑하고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 사랑은 불안했고, 외로웠던 것 같다. 나를 내던지는 사랑,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질문이 아닌, 답을 하는 삶

 이상하게도 여기서 우리는 때때로 이중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만’과 ‘태만’의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유리하게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p154)

 죽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삶의 존엄함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p168)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p190)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p191)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테리 이글터, ‘신을 옹호하다’)는 것입니다. (p195)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할 수 있는가. 누가 나를 가치 있다고 하는가. 누가 나를 좋아하는 가. 라는 헛된 질문은 접어두자. 대신. 고독할 땐, 고독한 대로. 슬픔이 몰려올 때는 슬픔을 그대로 마주하자. 별 것 없고 유치한 내 모습도 그대로 마주하자. 오히려 죽음을 눈앞에 항상 그리며 살아야겠다.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내일 원전이 터져서 더 이상 오늘 같은 내일은 없다면 어떻게 오늘을 살지 생각해보자. 맛있게 밥을 먹고, 아이들과 산책하고 함께 웃고, 남편을 안아주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주겠지. 누군가의 시선을 생각하고 비교하고 괴로워하지 않고, 내가 정말 좋아하고 즐기는 순간을 보내고 오히려 여유로울 수도 있겠다. (끝)



+ 덧붙여... 이 책에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불안에 대한 통찰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나는 참 여전히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있구나.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좋은 과거] 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누고, 쓴 글.

35년만의 휴식

2012. 3. 30. 14:48

한동안 참 많이 힘들었다. 봄을 타서 일수도 있고, 여울이 낳고 전업 육아만 한지 2년이 넘어가니 한계가 온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갈등, 불쑥불쑥 아이에게 쏟아 놓는 화, 남편에 퍼붓는 비난의 말들. 어느 정도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보다 더 나의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심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껴가면서 답답했다. 

이전에는 애들 좀 키워놓고, 일을 시작하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는데.. 곰곰히 들여다보니, 여울이까지 어린이집에 보내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아이들과 남편에게 화내는 일이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거기서 절망이 느껴졌다. 폭발할 것만 같은 마음, 어머님이나 남편이 애들을 봐주고 나만의 시간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해결되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내 머리속에는,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보기 싫어도 항상 틀어져있는 지하철 광고처럼, 머리 위에 항상 몇 장면이 생생이 떠올라 일상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억하기 싫은 몇가지 기억과 영상들. 그런데 자꾸만 반복되고, 애들을 키우면서 나의 모습과 그 영상들이 겹쳐져서 더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에게 '정신과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아 봐야겠다.' 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그런데,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러다가 이책, '30년만의 휴식'을 추천받았다. 추천한 이웃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읽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출판사도 마음에 안들었고, 별 기대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이 참 친절하게 쓰여져 있었다. 작은 글 하나에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친절한 필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보며, 자연스럽게 나도 내면에 숨어있던 나의 어린시절, 꼭 꼭 숨겨져 있는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얼마전 티비에서 봤던 구성애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의식의) 언어로 풀어내다보면 점점 비의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 생각속에만 있는 것들을 말로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건들, 장면들을 열심히 적어보았다. 

며칠 간, 밥하는 것도, 집 치우는 것도 제쳐두고 책 읽기와 글 쓰기를 계속했다. 누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말 친절하고 나를 비난하지 않을 정신과의사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생각나는대로 말이 되든 안되든, 열심히 풀어냈다. 팔목이 얼얼할 정도로. 때로는 억울했던 감정을 그 대상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무석 선생님의 또 다른 책, 자존감과 친밀감 책도 주문해서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대로 내 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남편과 꼭 나누고 싶은 것은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책을 읽고, 적으면서 생각보다 나의 삶에 참 복잡하고, 슬프고, 불쌍하고, 부끄럽고, 어찌할 수 없었던 순간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책읽고, 마음에 있는대로 글을 쓰면서 스르륵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만큼 가정을 꾸리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어려운 순간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누군가가 있었구나. 가해자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은 스스로 그 순간을 후회할 수도 있고, 그들 역시 어쩔 수 없어서, 약해서, 힘들어서 나에게 그랬겠구나. 라는 마음도 들었다. 지식으로 앎이 아니라,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내 마음이, 자라고 있다. 내 나이 서른 다섯에, 내 마음속에서 자라지 못하고 있던 아이가 조금씩 자라서 마음 넉넉한 어른마음으로 되어 가고 있다. 2주 정도, 내 마음을, 나의 비의식의 공간을 살피고, 다독이면서. 지금 내가 아이나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이, 바로 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누군가, 내 마음에 있는 (그 때는 화조차 내지 못했던) 대상들에 대한 화, 분노라는 것도 보게 되었다. 

여름이가 며칠 전에 '엄마, 요즘 엄마가 많이 웃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큰 상을 받은 것 같다. 그거면 충분하겠다. 많이 웃는 엄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아, 저 사람도 아파서 저러는구나. 저렇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라 고생각할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괜찮겠다. 남편은 '네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아', '나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정신없이 직장생활하며 지냈으면, 내 마음도 돌아볼 여유없이 지냈을텐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마음, 내 마음의 바닥, 그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업 육아의 시간이 참 고맙다. 나의 실체를 드러내어 보여준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이 시간들을 격려해주며 따뜻하게 안아준 남편에게도 고맙다.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책. 마음 한 켠에 해결 안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이유 없이(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솟구치는 분노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면 일단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30년만의 휴식 - 자존감 - 친밀감' 순서로 읽으면 좋다. 


* 30년만의 휴식 / 이무석/ 비전과 리더쉽



두번째 만남

2012. 1. 21. 03:10


'그냥 들어가 앉아 있어. 추워.' 
내가 사 가지고 간 단감 하나 깎아 드시고는,
밥 부터 먹고 이야기 시작하자고 또 부엌에 나가 밥상을 차려오신다.
새로한 밥에 메밀묵, 곰탕, 김치, 며느님이 해오신 메추리알과 꼬막 고치 반찬.
직접 농사지은 메밀로 만든 메밀묵이 묽게 되었다 하셨지만, 맛있어서 꿀덕꿀떡.
참, 밥먹기전에 할머니가 만드신 조청도 담아주셔서 맛을 보았지.
할머니의 특제 차도 한잔 마시고. 지난번엔 커피도 타주셨는데 오늘은 양파껍질, 생강 등을 끓인 것만 가지고 오셔서 아이구 매워라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먹었지.

홍동에서 광천, 광천에서 할머니집까지 두번 버스를 갈아타고 좀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승용차로 가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를.
2시간 가까이가 걸려서 갔다.
월림리로 가는 버스를 놓친 것인지 또 30분이상을 기다려 장곡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할머니만 만나는게 아니다.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고.
할머니가 농사지은 밥을 먹고. 
할머니가 다니는 길을 걷고
할머니가 타시는 버스를 타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의 마중을 뒤로 하고. 
할머니를 만난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오가는 길. 
욕심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한걸음씩. 할머니를 알아가고 배워가자. 

내가 좀 재밌게 살아왔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웃긴 여자야.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냥 하나님이 그자리에 나를 세워두셔서 그렇게 살아 올 수 있었던 것 같아. 정말 신기하지? 나도 어떻게 살아왔는지 참 신기해. 
생일날? 평일이라서 애들이 아무도 못왔어. 
그래도 큰 며느리가 아침 차려놓고 오라고 전화왔는데, 아침부터 가기가 귀찮어. 점심이나 저녁때 갈께 했더니, 또 생일상을 차려가지고 왔더라고. 
지금 소원은
다른 사람들, 자식들한테 폐끼치 않고 끝까지 살아가는 거. 그거 하나만 기도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이지만,
그래도 부끄러울 것은 하나도 없게 살아 왔어.  
그래, 또 와. 나도 이야기 하니깐 재밌네. 
다음에는 버스 시간 잘 알아보고 추운데 많이 기다리지 말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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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처럼... 때로 흔들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by cosmo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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